크라코프  - 아우슈비츠 수용소, 역사상 가장 잔혹한 흔적을 찾아

 

 

 

아우슈비츠 수용소..

오슈비앵침

아우슈비츠는 독일이 폴란드를 지배하면서 바꿔버린 이름이고 폴란드어로 오슈비앵침이라고 한다.

고로, 오슈비앵침이라는 표현이 사실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철문을 통과해 들어가는길.

추적추적 내리는비.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가슴한켠이 턱하고 막혀오는 기분이 든다.

괜시리 우울해지고 먹먹해지는 기분을 컨트롤하며 걸음을 내딛는다.

 

 

 ★  눈앞에 보이는 붉은건물. 수용소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TIP  
 

인류가 저지른 광기의 역사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50㎞ 지점에 위치한 아우슈비츠는 문명을 배반한 야만의 극치이며 인류가 저지른 가장 잔혹한 행위의 흔적이다.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의 상징인 강제수용소로 잘 알려져 있는 아우슈비츠는 원래 인구 5만 명의 작은 공업도시로, 폴란드어로는 오슈비엥침이라고 한다.

 

이 도시의 외곽에 있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수용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생지옥을 만나게 된다.

학살한 시체를 태웠던 소각로, 카펫을 짜기 위해 모아둔 희생자들의 머리카락, 유대인들을 실어 나른 철로, 고문실 등이 끔찍했던 광기의 역사를 전해 준다.

 

 

4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의 현


1940년 봄, 친위대 장관인 하인리히 힘러가 주동이 되어 가시철망과 고압전류가 흐르는 울타리, 기관총이 설치된 감시탑을 갖춘 공포의 강제수용소를 세웠다.

그 해 6월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고, 1941년 히틀러의 명령으로 대량살해시설로 확대되었으며, 1942년부터 대학살을 시작하였다.

 

 

열차로 실려온 사람들 중 쇠약한 사람이나 노인, 어린이들은 곧바로 공동샤워실로 위장한 가스실보내 살해되었다.

이처럼 가스, 총살, 고문, 질병, 굶주림, 심지어는 인체실험을 당하여 죽은 사람이 40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 중 3분의 2가 유대인이다.

희생자의 유품은 재활용품으로 사용했고, 장신구는 물론 금니까지 뽑아 금괴로 만들었으며, 머리카락을 모아 카펫을 짰다

뼈는 갈아서 골분비료로까지 썼으니 사람의 몸뚱이 중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우슈비츠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1945년 1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나치는 대량학살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막사를 불태우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 수용소 건물과 막사의 일부가 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7년 폴란드의회에서는 이를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

희생자를 위로하는 거대한 국제위령비를 비르케나우에 세웠으며, 수용소 터에 박물관을 건립하였다.

 

또한 나치의 잔학 행위에 희생된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 유네스코는 1979년 아우슈비츠를 세계문화유산에 지정하였다.

 

 

 

 

 

 

 

 

 

 

 

 

 

 ★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입구.

처음에 infomation이 있는 건물로 먼저 들어가자.

그곳에는 가이드투어에 대한 설명과 매점 오디오가이드 대여 등의 간단한 시설들이 있다.

하지만 개인관람이 가능하니, 가이드 투어를 원치 않는다면 혼자 들어가도록 하자.

 

또 이곳의 역사적 가치를 존중하여 상업적인 것을 배제하기 위해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공짜'로 들어가는만큼 더욱 경건한 마음으로 관람을 하고 희생자들에 대한 예우를 잊지말자.

 

그리고 건물 한켠에 서점같은곳에서 아우슈비츠를 설명해놓은 작은 포켓북을 판매하는데,

한국어판이 있다.

가격은 고작 5즈워티 뿐인데, 설명이 참 잘되어있고 지도와 루트까지 자세히 나와있으니.

꼭 사서 들고다니며 보기를 추천한다.

 

 

 

 ★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 정문.

ARBEIT MACHT FREI 라는 독일어가 쓰여있는 정문은 굉장히 유명하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뜻의 기만적인 문구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문구에 속아 죽임을 당했던가..

이 문을 통해서 매일 강제노동에 끌려나간 수감자들은 하루 12시간 이상씩 일을 해야만 했다.

 

수감자들이 강제노동에 나가고 들어올때는, SS대원이 몇 천명이나 되는 수감자들의 행진을 용이하게 통제할수 있도록

취사장 옆의 조그만 광장에서 수용소 오케스트라가 행진곡을 연주했다.

 

 

★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스산한 수용소의 정문과 풍경.

2차 세계대전중 독일 나치에 의해 점령되어 무려 5년간이나 국민들에게 엄청난 공포감을 심어준 악의 근원 그 자체였다.

독일의 SS사령부(Schutzstaffel,나치 독일의 친위대)와 경찰국이 계획해서 설립한 수용소.

1940년에 폴란드 정치범 수용을 위해 만든 이 수용소는 시간이 흐르며 전 유럽인, 특히 유태인, 집시, 소련군 포로등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은 인류최악의 범죄현장으로 바뀌게 된다.

 

 

 ★ 아직까지 차갑게 서있는 전기철조망.

 

 

★ 늘어선 철조망은 누군가에겐 통제의 수단, 누군가에겐 절망의 표식이었겠지.

 

 

 ★ 수용소의 붉은 건물.

수용소의 모든 건물들은 대부분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건물들이다.

흉흉하게 서있는 몰골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이상해지고 음산한 기분이 든다.

 

 

 ★ 수용소의 전경.

비도 추적추적 내리고.. 겨울이라 사람도 없으니 그 황량함이 배가 되어 느껴졌다.

거짓말 같겠지만 돌아보는 내내 그곳에서 죽어간 수백만명의 억울함과 슬픔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느낌을 여러번 받았다.

 

 

★ 수용소의 일상에 대해 설명해놓은 작은 표지판.

 

 

 ★ 15블럭. 각각의 건물에는 몇동이라는 개념으로 블럭이라는 표지판이 붙어있었다.

그리고 가장 처음으로 관람할 곳인 4블록으로 향했다.

 

 

 ★ 4블록 앞에 있던 어느 명언. 정말 가슴에 와닿는 말이었다.

"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자는 틀림없이 그것을 다시 겪으며 살게 될것이다. "

일본에게 치욕적인 제국주의의 역사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우리 역시 '절대' 잊어서는 안될것이다.

 

 

 ★ 5년간 나치가 아우슈비츠에 수용했던 사람들에 대한 것.

최소 130만의 사람들(110만의 유태인)이 끌려왔는데 약 110만명의 사람이 이곳에서 죽었고, 희생자중 90%는 유태인.

SS는 대부분을 가스실에서 살인했다라는 통계.

하지만 이것은 곳곳에서 낸 통계가 모두 다르다.

600만까지 죽었다는 곳도 있고, 400만이니.. 모두 조금씩 수치가 다르다.

그래도 결국 수백만의 엄청난 사람이 죽었다는것이 중요할뿐..

 

 

★ 희생자들의 유골가루를 모아놓은 함.

 

 

★ 유태인등은 사형선고를 받고 가스실에서 5~10분만에 죽었는데, 그들의 사인을 기록한 명부. 물론 전부 거짓이다.

 

 

★ 수감자가 몰래 숨겨서 간직해온 집시 수용인들의 명부.

 

 ★ 선별직전 이라는 제목의 사진.

 

 

★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 라는 슬픈 제목을 가진 사진.

 

 

 ★ 희생자들의 시체를 태우는 장면.

대부분의 수용인은 속아서 아우슈비츠까지 오게되고, 선별작업을 통해 강제노동 or 죽음 이라는 극단적인 길에 선다.

 

 

★ 가스실 살인에 사용된 독가스. 사이클론 비(Cyklon B).

 

 

 ★ 사이클론 B를 쓰고 난 통들.

약 1500명을 죽이는데 6~7kg의 독가스가 필요했다고 한다.

 

 

★ 머리카락. 이곳에 약 2톤의 머리칼이 전시되어있다.

희생자들은 죽고 나서 금이빨을 뽑히고, 머리카락이 잘리고 반지, 목걸이 등이 제거 된후 화장되었다.

그중 가장 끔찍한 결과물이 바로 이 머리카락이다.

수용소가 발각되던 당시, 공장으로 보내기 위해 창고에 숨겨놓은 약 7톤의 머리카락이 발견되었다.

이 머리카락으로 독일공장에서 매트리스와 천 등을 제조하였다.

 

 

 ★ 희생자들의 안경..

 

 

 ★ 거동이 불편했던 희생자들의 흔적. 목발, 보행기, 의족..

 

 

★ 수감자들이 가져오거나 사용하던 식기들.

 

 

★ 수용소안에서 밖을 보면 이런 풍경이다..

아무런 희망도 바랄수 없었던 그들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느낄수 있었다.

 

 

★ 희생자들의 트렁크 가방.

 

 

 ★ 희생자들의 신발.

4,5 블럭에는 이렇게 희생자들의 유품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너무나 많은 양에 놀라고 충격받지만, 이것역시 극히 일부라는 사실은 더욱 놀랍기만 하다.

 

다시 밖으로 나와 다른 건물로 가보았다.

 

 

 ★ 수용소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6블럭으로 가보았다.

 

 

★ 희생자들의 사진.

 

 

 ★ 75kg이던 이 여성은 25kg이 되었다.

수감자들의 하루 식사량은 1300~1700칼로리를 넘지 못했다.

아침식사로 '커피라 불린 액채' 500cc와, 점심식사는 거의 물뿐인 썩은 야채로 만든 수프 1리터밖에 먹지 못했다.

저녁식사는 300~350g의 검은빵과 소시지 20g이나 30g의 마가린 혹은 치즈, 그리고 채소음료가 전부였다.

그들은 그렇게 하루 12시간의 중노동을 해야만 했다.

 

 

 ★ 수용소 외곽

 

 

 ★ 수감자들의 일사분란한 이동을 돕기 위한 오케스트라의 행진곡 연주장면.

 

 

★ 희생자들의 수많은 사진들.

 

 

★ 아이들과 임산부의 유품들.

극악무도한 나치들은 어린아이나 임산부도 어른들과 똑같은 수용소 규칙을 적용시켰고, 예외없이 죽였다.

어떤 아이들은 범죄적인 의학실험의 재료가 되었고, 중노동을 당하기도 했다.

 

 

 ★ 수많은 아이들의 사진.

이 어린아이들도 똑같이 고문에 처형에 중노동.. 그들의 잔인함에 치가 떨렸다.

 

 

★ 7블럭에 들어가면 볼수 있는 지푸라기.

이곳이 바로 수감자들의 잠자리였다.

 

 

★ 벽돌침대.

저 작은 칸에 무려 4~5명이 들어가 잠을 잤단다.

 

 

 ★ 11블록의 죽음의 블록.

사형집행을 볼수 없게 하기 위해 막아놓은 공개 사형장으로 가는곳.

 

 

★ 10블록 건물 창문에 붙은 나무판, 역시 그곳에서 자행된 사형집행을 볼수 없게 하기 위한것이다.

 

 

★ 총살의 벽.

SS대원이 수천명의 수감자들 (주로 폴란드인)을 이 벽에서 총살했다.

 

 

 ★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총살의 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벽 가까이 다가가보았다. 역시나 기분이 굉장히 우울해진다.

 

 

★ 11블록 형무소의 지하감옥.

 

 

 ★ 지하감옥 내부.

 

 

 ★ 이 좁은 공간에 무려 4명을 밀어넣어 세워놓는 벌을 주던 곳.

가로 세로 각각 90cm..

 

 

★ 지하감옥의 스산한 복도.

 

 

 ★ 이들은 저항운동 중심세력이 되었던 분들.

생명의 위험속에서도 SS에 대항해 저항운동을 시도하였다.

반 나치 연대감을 고조시키기 위한 활동이 비밀리에 행해졌고, 극비로 외부와의 연락 등을 취하기도 했다.

또 예술 창작활동과 종교활동 등도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 수용소 끝자락 철조망의 경고문.

 

 

 ★ 텅빈 수용소 공간. 뭔가 끔찍한 상상이 되기도 한다.

 

 

 ★ 점호광장에 있는 집단교수대.

 

 

점호광장, 이곳에 수많은 수감자들을 세워놓았다.

 

 

★ 경비초소,

 

 

★ 경비초소, 뒤쪽은 취사장.

 

 

★ 철조망.

 

 

★ 수용소 건물을 막아놓은 전기 철조망..

오른쪽은 수감자들의 수용소, 왼쪽건물은 SS관리국.

 

 

 ★ SS병원.

 

 

 ★ 1947년 4월16일에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의 사형을 집행했던 교수대..

 

 

 ★ 지하실로 가던 입구

 

 

★ 이 무시무시한 건물이 바로... 가스실이다.

 

 

★ 사진으로만 봐도 숨이 턱 막힐것 같은 이곳이.. 사체안치소였던 곳을 개조해 만든 가스실이다.

수많은 유태인들이 이곳에서 고통스럽게 독살되던 공간.

 

이곳에 혼자 멍하니 서있으니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벽에는 죽어가며 발버둥친 희생자들이 남긴 손톱자국이 보인다.

 

 

★ 희생자들의 사체를 화장하기 위한 가마.

이 가마로 하루에 400명에 가까운 희생자들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 사이클론 B가스가 나오던 구멍.

 

 

★ 음산한 가스실과 굴뚝...

 

 

 ★ 입구로 가는길.

 

 

 ★ 철조망에 맺힌 빗물이 괜시리 돋보인다.

 

 

 ★ 수용소 외곽 사령부.

 

 

★ 아우슈비츠를 나오면서본 마지막 장면

 





여기서 부터는 제가 담은 사진 입니다

박성령님의 사진과 중복된 것은 제외 하고 몇장 올려 봅니다

 

 

 

 

 

수용소 외곽 사령부

 

 

 

 

각처에서 모여든 관람객 들

 

 

가이드의 사전 설명을 듣고

 

 

 

이것은 극히 일부지만  희생자들의 의족, 의수, 보행기

 

 

뭔지도 모르고 강제로 끌려온 주부 들의 살림 집기

요리도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며  여유 있는 마음으로 따라 나섰을 것이다

 

 

옷 몇가지 휴대할 물건들이 담겨졋던, 그때 당시 최고급 였던 가죽 가방, 트렁크

 

 

나는 이 장면이 제일 가슴이 먹먹 했다

어디로 가는줄도 모르고, 앞 일을 모르고 따라나선 희생자들은 피크닉을 가는것 으로 알았나보다

저 예쁜 대 나무 바구니엔 소풍가서 먹을 간식 거리가 담겨 있었다 하니.....

 

 

아무것도 모르는,간난아이들의 저 옷...  이렇게 어린 아이들까지 다 죽였다

간난아이 옷 .....   인형도 .... 소꿉놀이 감 도 있다....

 

 

 

신발, 이건 일부, 산더미 보다 더 높이 쌓여 있었다 

400만명의 목숨 이었으니....

 

 

 

 

 

 

머리빗, 화장품도구, 상당히 부요한 사람들이 많이 희생된듯,,,,,

 

 

 

 

 

 

 

우리 일행들의 옷 차림은 이렇게 화사 하다

그때 , 그날,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 나섰던 그 들의 옷 차림도  이러 했으리....

 

 

 

 

 

 

 

 

사림을 불 태워 연기로 내 보낸 굴뚝

 

 

 

사람들이 고통을 몸부림치다 견딜수없어 벽에 할킨 손톱자국들

 

 

 

 

고압전선, 철조망

 


         

사진 촬영이 금지된 곳도 있어 마음에만 담고, 사진으로는 담지 못한 내용들도 있습니다

 

잘 이해 되셨는지요

이 수용소를 관람 하면서

저는 10 여년 전에

독일어의 지명인 아우슈비츠로 더 잘 알려졌던 영화 {쉰들러리스트}를 기억 했습니다 

이미 치 를 떨었던 영화 {쉰들러 리스트} .....

 

우리일행은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관람하는 내내,  아이고~ 아이고~ 소리만 연발 나왔습니다

우리가 수용소를 관람하는 이날도 비 가 내렸는데

가이드의 말로는 오히려 이런날, 비가와서 다행이라 했습니다만

너무나 가슴 아프고 잔혹한 비극의 역사 현장을 보고나니 우울하고, 그때의 아픔이 밀려오는듯 하여

이 날 저녁 식사를 제대로 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동 유럽을 여행 하실 계획이 있으시다면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꼭 한번 다녀오시기를요....

2차 세계대전때 일본에 의해서 겪어야 했던 우리민족의 아픔과 같은

우리 민족의 한 때문에, 동질감 때문에, 인류가 저지른 광기의 역사 때문에

피가 꺼꾸로 솟 는것 같은 생 지옥을 만나는 현장 이기는 합니다만

가슴 아픈 역사도 우리의 역사인데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 역사는 또 반복 될 수 있습니다

 

대 학살의 현장 꼭 한번 느껴 보시기를

감히 추천 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날의 비 는 추적추적 하고  참말로 우울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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