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편지 /이향아
등잔불 켜지듯이 능소화는 피고
꽃지는 그늘에서
꽃 빛깔이 고와서 울던 친구는 가고 없다
우기지 말 것을
싸웠어도 내가 먼저 말을 걸 것을
여름이 익어갈수록 후회가 깊어
장마 빗소리는 능소화 울타리 아래
연기처럼 자욱하다
텃밭의 상추 아욱 녹아 버리고
떨어진 꽃 빛깔도 희미해지겠구나
탈없이 살고 있는지 몰라
여름 그늘 울울한데
능소화 필 때마다 어김없이 그는 오고
흘러가면 그뿐 돌아오지 않는단 말
강물이야 그러겠지
나는 믿지 않는다
능소화 / 나태주
누가 봐주거나 말거나
커다란 입술 벌리고 피었다가, 뚝
떨어지는 어여쁜
슬픔의 입술을 본다
그것도
비 오는 이른 아침
마디마디 또 일어서는
어리디 어린 슬픔의 누이들을 본다
능소화 / 산오자
더위 먹고서야
어벙하게 가슴을 여는 꽃
장대비와 새우비를 피해
처마 밑의 벽이나
나무 등걸을 타다
정작 높이 올라서는
비 맞고 피어나는 꽃
우리 집 마당에 능소화가 져서
바람에 날리며 딍군다
세월 가면 그녀도
능소화 향기로 색깔로
내 방문 앞에 보고픔에 날리어
오랜 그리움으로 서성일까
능소화 / 이정선
교회 언덕에 능소화가 피었다.
친정 집 대문타고 피던 능소화
능소하 꽃 술 헤치고 가만히 걸어 들어간다.
저만치 마당이 보이고
감나무 및 평상에서 모시적삼 손질하는
어머니가 보인다.
그 곁에 공기놀이에 바쁜
키 작은 아이가 있다.
나지막이 사시던 어머니 닮은
능소화가 피었다.
능소화 / 김신오
여행 떠나는 아침
달이 먼저
앞장 섰다
노모님 연락 안하고
모른척 떠나는데
죄진 맘 크고
능소화 되어 기다리실
어머님
강물에 무겁게 흐른다
해는 왼쪽으로 갔다가
정면으로 서있다가
오른쪽으로 돌아본다
투명한 햇살이 쏘아본다
잘 갔다 오너라
내내
감시하고있다
능소화 / 이원규
꽃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화무십일홍
비웃으며
두루 안녕하신 세상이여
내내 핏발이 선
나의 눈총을 받으시라
오래 바라보다
손으로 만지다가
꽃가루를 묻히는 순간
두 눈이 멀어버리는
사랑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기다리지 않아도
기어코 올 것은 오는구나
주황색 비상등을 켜고
송이송이 사이렌을 울리며
하늘마저 능멸하는
슬픔이라면
저 능소화만큼은 돼야지
능소화 / 홍해리
올라가야 내려가는 것을, 어찌
모르랴 모르랴만
너야 죽거나 말거나
인정 사정 볼 것 없다고
숨통을 끊어야 한다며
흐느적이는 빈 구석 그늘 속으로
몰입이다
황홀이다
착각이다
천파 만파 일렁이는 저 바람
막 피어나는 꽃이 눈부시게 흔들려
치렁치렁 그넷줄이 천길이네
흔들리던 바람이 길을 멈춘 대낮
그넷줄 잡고 있는 진이
팽팽한 치맛자락 속으로
깊은 뜰
높은 담을 넘어온
화담의 묵향이 번져
허공을 가벼이 뛰어내리는
화려한 절체/절명의
가녀린 유혹
도발이다
일탈이다
광풍이다
능소화 / 한현수
떨어진 꽃잎에서 행여
파릇한 눈자위 보거든
사랑할 수록
스스로 깊어가는 강물의 바닥,
아픔에 닿을 것 같아
차마 못다한 사랑
눈 감지 못한 꽃을 보거든
나도 사랑의 덫에 갇혀
왈칵, 허물어지지는 않을지
담 밑에 뒹구는 꽃잎을 주워
가슴에 가져가 보는 주홍빛 사랑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능소화 연가 / 이해인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당신이 보고 싶어
내 마음이 흔들립니다
옆에 있는 나무들에게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가지를 뻗은 그리움이
자꾸자꾸 올라갑니다
나를 다스릴 힘도
당신이 주실 줄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주는
찬미의 말보다
침묵 속에도 불타는
당신의 그 눈길 하나가
나에겐 기도입니다
전생애를 건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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