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편지를 읽는 저녁 / 황영선

 

 

비내리는 분황사 뜰에

막 핀 배롱나무 꽃 송이들이

제 몸의 꽃빛을 풀어

시를 쓰고 있었지

 

받아적기도 전에 지워지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본 일 말고는

이 저녁 한 일이 아무것도 없지만

가슴에 물기처럼 번지는 그것이 시가 아니었을까?

 

귀열고 문 열어두어도

나는 아직 캄캄한데

한 몸인 듯 편안해진 모습으로

어둠과 빛의 경계를 허물고 있던 풍경소리

 

백 년도 못 견딜 생애

쓸쓸한 저녁이 찾아오면

흐린 불빛에 기대어 시를 읽다 잠이 들겠네

못다 읽은 시편들은 가슴으로 읽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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