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매도 / 조용미
내 앞에 아른아른 떠 있는 저 여린 색들은
이 봄을 규정한다 지금 여기 이곳을 자주 비우는
내 삶을 규정한다
여름과 겨울의 감각을 내정한다
지난겨울 천의와 박대를 휘날리며 허공을 날고 있는 닫집의 비천상을 고개 젖혀 오래 바라보았다
어둑한 붉은색과 희고 푸른색들은 장엄하였으나 슬픔은 줄어들지 않았다
옥룡사 터 동백 숲 떨어진 붉은색들이 일제히 향한 쪽으로 내 운명을 짚어볼까 잠시 망설였다
무덤이 사라지고 탑이 들어선 자리는 너무 환해 그곳으로 나가지 못했다
밝은 곳과 붉은색들은 희미해져가고 사라져가고
내 발아래 붉은 꽃들은
뭉개어지는 빛들은, 목이 메어 자꾸 어두워졌다
고택의 엎어놓은 장독에 매화나무 가지 그림자가 어려 굵은 사선의 무늬가 생겨났다
늙은 매화나무가 강한 필세로 그려놓고 내가 발문을 쓴 귀한 묵매도 한 장 얻어 온 후 신기하게도
이 몸의 슬픔은 약간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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