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자를 벗고
/ 이근배
글씨는 더더욱 모르고
붓도 제대로 못 잡으면서
秋史, 그 높은 다락을
목이 빠지게 올려다보고 다녔다
더도 덜도 말고 예서(隸書) 한 점만!
턱없는 소원 갖던 내 눈에
어느 날 인사동 골동가게에서
築屋松下 脫帽看詩
(소나무 아래 집을 지어
모자를 벗고 시를 읊는다)
여덞 글자가 번쩍 띄었다
낙관이 없어도
추사가 아니고는 흉내도 못내는
신필(神筆)이거니
나는 덥썩 품에 안았다
내 언제 모자를 벗고
시 앞에 서 본일 있었던가
헛되이 종이에 먹물만 칠해온
부끄러움이 앞섰다
사랑땜도 하기 전에
글씨는 남의 손에 넘어갔지만
모자를 벗고,
그 말씀, 내게는 못다 쓸
천금(千金)으로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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