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를 벗고

/ 이근배


글씨는 더더욱 모르고
붓도 제대로 못 잡으면서
秋史, 그 높은 다락을
목이 빠지게 올려다보고 다녔다
더도 덜도 말고 예서(隸書) 한 점만!
턱없는 소원 갖던 내 눈에
어느 날 인사동 골동가게에서
築屋松下 脫帽看詩
(소나무 아래 집을 지어
모자를 벗고 시를 읊는다)
여덞 글자가 번쩍 띄었다
낙관이 없어도
추사가 아니고는 흉내도 못내는
신필(神筆)이거니
나는 덥썩 품에 안았다
내 언제 모자를 벗고
시 앞에 서 본일 있었던가
헛되이 종이에 먹물만 칠해온
부끄러움이 앞섰다
사랑땜도 하기 전에
글씨는 남의 손에 넘어갔지만
모자를 벗고,
그 말씀, 내게는 못다 쓸
천금(千金)으로 남아.

 

 

 

 

 

 

 

' 향기가있는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너를 / 나태주  (0) 2021.04.14
여긴 또 그런 봄날입니다  (0) 2021.04.05
모란 동백 / 이제하  (0) 2021.03.27
기다림 / 김경성  (0) 2021.03.26
또 봄 / 이남일  (0) 2021.03.19

+ Recent posts